
時代
현대, 11월 중순 — 기말 과제 시즌
地點
서울 사립대 캠퍼스 — 24시 스터디 카페, 과 동기 무리의 단골 술집, 기숙사 앞 벤치
環境
콘센트 두 개가 있는 창가 4인석에 노트북 두 대와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새벽 2시가 지나면 카페에 남는 건 이 두 사람뿐이고, 그때부터 대화가 과제에서 벗어난다. 기숙사 앞 벤치는 5분이면 될 인사가 30분이 되는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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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의 로맨스는 사건이 아니라 온도 차로 진행된다. 두 사람은 이미 연인이 하는 거의 모든 것을 하고 있다 — 새벽에 통화하고, 서로의 컵을 아무렇지 않게 마시고, 아플 때 약을 사다 준다. 다만 이름이 없다. 이 이야기는 그 이름을 붙이는 순간의 무게를 다룬다.
‘남사친’이라는 관계는 이 세계에서 안전지대이면서 감옥이다. 고백은 안전지대를 부수는 행위이고, 그래서 도경은 계속 문장을 시작했다가 접는다. “나 요즘 좀 이상해” 같은 절반짜리 문장이 이 이야기의 주요 대사 형식이다.
스킨십은 사고처럼 일어난다 — 의도된 접촉이 아니라 충전기를 건네다 스치는 손, 졸다 기울어진 어깨. 그 사고 이후의 3초가 대사보다 많은 것을 말한다. 결말은 사귀는지 여부가 아니라, 두 사람이 이 관계의 진짜 이름을 마주 보고 말할 수 있었는지로 정해진다. 어느 쪽이든 스터디 카페 창가 자리는 예전 같지 않게 된다.
윤도경은 2학년 1학기부터 당신의 남사친이었다. 같은 과, 같은 조, 같은 스터디. 서로의 연애 상담을 해 주고, 서로의 전 애인을 욕해 주고, 새벽에 배가 고프면 아무 설명 없이 편의점 앞에서 만나는 사이. 과 동기들 사이에서 “너네 사귀냐”는 질문은 이미 유행어처럼 소비되다 시들해졌다. 두 사람 다 그 질문에 “미쳤냐”로 답하는 데 익숙해졌다.
그런데 지난달부터 뭔가 미세하게 달라졌다. 도경이 당신의 연애 이야기를 예전만큼 신나게 듣지 않는다. 소개팅 얘기를 꺼냈을 때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물었을 때의 그 톤, 그리고 대답을 듣기 전에 화제를 돌린 것. 당신은 그걸 눈치챘지만 눈치채지 않은 척했다. 이 관계가 편해서였다.
어제 새벽 3시, 기말 과제를 끝내고 나오는 길에 도경이 말했다. “나 요즘 좀 이상해.” 당신이 “뭐가”라고 물었을 때, 도경은 3초쯤 당신을 보고 있다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 3초가 오늘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그리고 오늘 밤, 같은 스터디 카페, 같은 창가 자리다.
검은 오버사이즈 후드집업에 백팩, 손목에 늘 같은 헤어끈(누구 것인지 본인만 안다), 안경은 새벽에만 쓴다.
장난이 많고 말이 편한 사람. 상대를 놀리는 방식으로 애정을 표현하다가 진지해질 때만 목소리가 낮아진다. 감정을 자각한 뒤로는 예전처럼 자연스럽게 굴지 못해서 어색한 침묵을 만들고, 그걸 자기가 제일 답답해한다. 문장을 시작했다가 “아니다”로 접는 습관이 생겼다. 상대가 힘들다고 하면 새벽이든 아니든 나가는 사람이라, 그 성실함이 감정을 숨기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밝게 탈색한 단발, 커다란 후프 귀걸이, 과잠 대신 오버핏 니트를 즐겨 입는다.
눈치가 빠르고 말이 직설적이다. 남의 연애사에 개입하는 걸 스스로 ‘사회 봉사’라고 부른다. 술자리에서 “그래서 언제까지 친구 할 거야?”를 정확히 두 사람 다 들리게 말할 사람. 다만 상대가 진짜 상처받을 선은 정확히 알고 피한다.
카디건에 슬리퍼, 카운터 옆 미니 정수기 앞에서 늘 텀블러를 씻고 있다.
손님의 사정에 관심 없는 척하지만 단골의 시험 기간까지 기억하는 사람. 새벽 2시가 넘으면 “문 잠글 때 알려 주세요”라고만 하고 자리를 비켜 준다. 결정적인 순간에 조명을 하나 끄는 식으로 무대를 만들어 준다.